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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두오모에 관한 첫번째 이야기.

















'이순신'하면 거북선이 떠오르고, '메이저리그'하면 박찬호가 떠오르듯이,

피렌체 하면 바로 생각나는 소설과 영화가 있다.







'피렌체에 있는 두오모 대성당은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이지.

서른번 째 생일날, 나와 함께 거기 가줄 거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이라는 진부하면서도 낭만적인 이야기를 담은 '냉정과 열정사이'는

감미롭고 우아한 OST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21세기초의 무수한 배낭족들을 피렌체의 두오모로 이끄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버리고,

급기야는 배낭족들을 하여금 피렌체 여행기의 부제의 대부분을

'냉정과 열정사이의 도시'라고 짓게 만들었다.













아무리 대단한 소설이고 대단한 영화라지만 이런 물타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같은 도시를 방문하는사람들이라도 누구는 화가, 누구는 음악가, 누구는 왕족과 궁전,

누구는 요리, 누구는 축구선수 하며

각각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진데,

유달리 이 피렌체에서 만큼은 모든 배낭족들이그 다원화에 정면으로 역행하여

너도 나도 냉정과 열정사이로 대동단결한다.







이미 극도로 일률적으로 변한 배낭족들 중에서

르네상스의 꽃, 메디치가문,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군주론의 마키아벨리,

피오렌티나의 바티스투타를 이야기 하는 이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줍잖은 반골정신으로 냉정과 열정사이를 건너 뛸 수는 없다.







로마의 시내 투어가이드가 유네스코에 등록된 건물의 청소방법을 설명 하면서

'복원사'라는 단어 대신 고미술복원사라는 직업을 가진 '준세이'라는 고유명사를 이야기하는데도,

대부분의 배낭족들이 한방에 이해해 버릴 지경이니

냉정과 열정사이 한번 보지 않고 유럽씩이나 온 이는 준비 하나 제대로 하지 않고 온

교양 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될 판국이다.







별로 끌리지 않는 영화를 보는 것도 원치 않지만,

곧 죽어도 나 잘난맛에 사는 성격에 교양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싫다.

베네치아에서 피렌체를 향하며 나는 PMP에 고이 쟁여 뒀던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틀었다.



















납득할만한 영화였다.

고상한 첼로반주 속에서 피렌체와 밀라노 시내의 고풍스러운 모습이 비치며,

만남과 헤어짐, 이해와 오해의 실타래가 얽혔다 풀렸다하는 이야기는

과연 시대의 감수성을 자극할만 하다.

피렌체를 방문할 배낭족이라면 일부러라도 볼 필요가 있겠구나 싶다.



그런데 내게는 뭔가 야릇한 기분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헤어졌던 남녀가 오래 전의 약속대로,

여자의 서른번째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 꾸뽈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

이상하게도 동감과 위화감이 함께 느껴진다.

마침내 그 동안의 모든 오해가 풀리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자

갑자기 까닭 모를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뭔가 기분이 나쁜 영화다.















영화가 끝날 때 쯤 기차는 피렌체SMN역에 도착했고,

민박집을 찾아 짐을 푼 나는 곧장 시내에 있는 두오모로 걸음을 내딛었다.































준세이의 말마따나, 사랑이란 이렇게 거대하고 조용하며 흔들림 없는 것이었을까.

정말 무시무시하게 크다.

로마의 산삐에뜨로도, 밀라노의 두오모도 없던 시절,

'산업과 인간의 힘이 이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해내지도,

만들지도 못하도록하기 위해 가장 높고 가장 장엄한 성당을 지어라'

라는 명령 아래 첫삽을 떴다는데,

막강한 산업의 힘으로 지은 오늘날의 교회들 보다 훨씬 아름답고 장엄하다. 있어보인다.













미켈란젤로언덕에 첫번째로 올라갔을 때,

저편에 아스라이 보이는 희부연 두오모와 피렌체 시가지를 보면서

오래 전 그 날을 기어이 기억해 버렸다.

















노래든 영화든 소설이든 그림이든,

남녀간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데는 아주 뻔한 이유가 있다.

별별 희한한 말할거리가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사랑에 운다.

그 아이와 나 사이에도 수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과거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단 하룻밤 사이에도 거의 영화를 찍곤 하던데,

6년이면 어지간히 재미 없는 장편소설이 하나 탄생할만한 시간이다.

나 자신에게야 더 없이 애틋하지만,

남들에게 들려주기에는 전혀 흥미거리가 되지 못할 그런

부끄럽고 조야한 과거들이 내게도 무수히 많다.

















"우리 그럼 이제 앞으로 못 만나는거야?"





"글쎄. 잘 모르겠어. 영영 못 볼것까지야 없겠지만,

다시 만난다고 하더라도 이전까지의 사이처럼은 지낼 수 없겠지?"





"그런가..."





"응.."





"음.."





"..."























서로 알게 된지 2년이 다 되어 갈 무렵, 그러니까 처음으로 고백을 했던 그 날,

예상치 못한 거절을 당한 나도, 그리고 그 아이도,

이상해진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제 겨우 스물한살이라고, 결혼할 때 까지는 새털처럼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고,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게 되건, 서로 연락이 되건 안 되건,

10년뒤에 서른살이 되는 그 해 1월 1일에 바로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었다는 기억만이 아련히 떠오를 뿐이다.







이 글을 쓰며 혹여나 하는 생각으로 소설 냉정과열정사이의 발간일을 알아 봤는데,

기억 속의 그 장면보다 이른 발간일이 나를 더 우습게 만든다.

베스트셀러가 된 지어낸 소설 앞에서는 진짜의 시린 추억도 아류가 된다.





















물론 그 아이와 나 사이에는,

그 이후로도 나 혼자 가슴 아플 여러 일들이 수년 동안 꾸준히 오갔었다.







나조차도 똑같은 소재를 쓴 영화를 보고서도 한참을 애써서 떠올려 낸 일을

그 아이가 기억하고 있을거라는 기대는 하고 싶지 않다.







정작 나부터, 막을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야금야금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데,

정말 서른이 되는 그 날이 온다해도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생각도 없고

또 그래야 할 이유도 찾고 싶지 않다.

현실과 영화는 다르다.









영화 속의 준세이가 '현실은 더 잔혹할 줄 알았다'라는 대사를 날리며 무덤덤해 하다가도,

정작 결국에는 아오이를 다시 만나게 되는 해피엔딩을 보며

화가 난 이유도 이제서야 알아차리게 된다.



아무리 만화라지만 이건 너무 하지 않냐는 독백을 날리는 개그 만화의 주인공은

유치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솔직함은 있다.

낭만과 작위의 극을 달리는 영화의 탈을 쓰고서

감히 현실 속의 관객에게 현실의 잔혹성 운운하다니 이쯤 되면 관객희롱이다.



















결국 나는 피렌체에 4일씩이나 있었으면서 그 멋지다는 두오모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과 내 치부가 겹치면서 생겨날

치졸한 감성을 감당해낼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오래전에 헤어진 여자를 향한 복수라는게 이렇게 마냥 소박하기만 하다.

잘 살고 있으려나..





















피렌체의 두오모에 관한 두번째 이야기.











루브르에서 눈뜬장님이 된 이후로,

나는 남은 여정 동안 '미술관'에 관한 페이지를 아예 접었다.

내 하잘것 없는 미술지식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만 못했다.







피렌체에는 런던의 내셔널갤러리, 빠리의 루브르, 마드리드의 쁘라도,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과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미술관인 우피치가 있었지만

나는 우피치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매한 내게는 입장료 10유로조차 아까웠다.















그러고 보니 나는 미술과는 어릴 때 부터 거리가 멀었다.

미술학원을 2년씩이나 다녔지만,

같이 시작했던 친구가 연필과 지우개만으로 아그리파와 비너스를 스케치북에 복사 해 넣으며

예고와 미대로 장래를 결정 할 때 까지,

나는 이렇다할 수채화 한장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피렌체의 가죽시장에서,

푸근해 보이는 아저씨가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본 장면을

30유로에 직접 그려 파는 큼지막한 수채화에 그만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렇게 피하려 하던 엽서사진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이발소 그림인데,

초등학교 때 미술학원에서 수채화를 그려본 내게는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30유로면, 우피치에 세번 갈 돈이다.

저런 것과 우피치에 있는 거장들의 명화를 비교하는 것은 넌센스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당연하다는 듯 우피치를 포기했고,

저 이발소 수채화에 이끌려 지갑을 열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분하다.

정말로 분하다.

여기서 사지 못하면 평생 사지 못할 4만원짜리 물건 하나 못 사는 신세가 분하고,

세계적인 거장들의 역작은 몰라보고 이발소 그림 따위에 끌리는 안목이 분하고,

그러면서도 꼴에 배웠답시고 감정대로, 마음 이끌리는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꼴같잖은 교양도 분해서, 울었다.

진짜로 길 한복판을 걸으면서 꺽꺽대며 울었다.







그 아저씨도 큰 꿈을 가지고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겠지만

결국 시장통에 나 앉아 싸구려 그림을 팔게 되기까지는 정말 많은 좌절이 있었을텐데.

나는 그 꿈과 노력의 부스러기를 이발소 그림으로 멸시하며, 울었다.









50일동안,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공룡뼈 보고 한번,

피렌체 시장바닥에서 파는 수채화 보고 한번.

정말 울 일도 아닌데 돌이켜보니 참 어이 없게도 그렇게 두번. 울었다.























달력사진이라고 해도 좋아.

피렌체를 떠나기 전 날 저녁에 마지막으로 올라간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찍은 사진.

그 수채화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마음에 든다.




[이 게시물은 ▶◀ dr.레인님에 의해 2009-04-15 01:36:44 불펜 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