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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뉴욕에 갔을 때, 9·11 테러가 발생했던 자리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거대한 가림막에는 ‘9·11’이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마천루가 즐비한 가운데 푹 꺼진 이곳은 여전히 끔찍했던 당시의 참사를 웅변하고 있었다. 함께 갔던 현지의 지인에게 물어보니 거대한 추모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했다. ‘세계 최고의 금싸라기 땅이라는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추모시설을 짓다니…’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이내 부끄러워 지인에게 말도 꺼내지 못했다.

지금 그곳에는 ‘부재의 반추(Reflecting Absence)’라는 이름으로 추모공원이 조성돼 있다. 깊이 9m, 면적 4000m² 규모로 쌍둥이 연못을 만들어졌다. 가장자리에는 테러 희생자 약 3000명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연못 옆에는 테러 현장에서 살아남았던 배나무가 심어졌다. ‘생존 나무’로 불린다고 한다.

8년 전 뉴욕의 풍경이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삼풍백화점 참사 20주기 관련 기사를 준비하다가 서초구의회의 회의록을 읽었을 때였다.

"좋은 데가 얼마나 많나. 꼭 우면산 자락만 좋으냐, 그것 말고도 좋은 데가 천지니까 거기에 가서 하면 될 것 아니냐?" (A 의원)

"많은 사람들이 봄철이면 야유회도 즐기는 곳이고 또 웨딩촬영을 하는 그런 장소로 사용된다. 이런 지역에 굳이 삼풍백화점붕괴 위령탑을 세워야하는지 본 의원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B 의원)

1998년 2월 서초구청이 제출한 ‘삼풍사고 희생자 위령탑 건립부지 사용승인 동의안’에 대한 의원들의 항의성 질의였다. 회의에 출석한 서초구 총무국장의 답변은 이랬다.

"당초 (삼풍백화점 참사 유족들이) 요구한 것은 제2지구 가장 중심지역에 502평 부지다. 그 위치는 시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이다. 높이 몇m 그리고 방대한 그런 위령탑을 세워 놓으면 거기가 위령공원이지 시민의 휴식공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현재 유족들은) 제2지구 윤봉길 매헌기념관 맞은편의 KAL추모탑과 백마위령탑이 있는 그 뒤편 가장 으슥한 곳에 당초에 한 66평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 규모가 품위나 품격으로 보아서 도저히 백마유격대 충혼탑보다 커서는 안 된다. 그래서 60평 이내로 만일 한정한다면 저희들이 동의할 수 있다.”

이날 회의에 올라온 것은 3번째 수정안이었다. 서초구의회는 이미 2번 ‘퇴짜’를 놨다. 결국 서울시와 서초구청 측은 ‘(양재시민의 숲에서) 뒤편 가장 으슥한 곳’에 ‘품위나 품격으로 보아 백마유격대 충혼탑보다는 작게’, 또 유족들이 당초 요구한 규모의 1/10로 축소한 대안을 내놓고 비로소 ‘간신히’ 구의회의 동의를 받았다.

그렇다면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탑은 왜 사고 현장에 세워질 수 없었을까.

당초 서울시는 사고 직후 유족들에게 사고 현장에 위령탑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2년만에 뒤집혔다. 그에 대해 당시 서초구청에 근무했던 한 퇴직 공무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유족들 보상금으로 거의 천 억원대가 필요한데 시에 그런 돈이 없었다. 결국 부지를 팔아서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주변에 살던 일부 주민들의 반대도 심했다. 땅값 떨어진다고…."

결국 사고 현장은 기업에 매각됐고 2004년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다. 서울시가 약속한 대체부지는 양재시민의숲으로 바뀌었고, 서초구의회와 ‘핑퐁게임’을 벌이다 사고 발생 3년째서야 간신히 부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이 과정에서 또 다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사 고 20주기인 지난달 29일 위령탑에서 만난 유족 김문수씨는 "왜 사고와 전혀 무관한 자리에 위령탑이 세워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 때 거기에 단 50평이라도 안전공원이라도 하나 만들어놓으면 되는데 무슨 혐오시설인 것처럼 구석에다가 이걸…." 충혈된 눈으로 말을 마치지 못했다. 김씨를 비롯해 일부 유가족들은 한동안 참사 주기때면 위령탑 대신 사고 현장인 주상복합아파트로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502명이 사망해 6·25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참사였고 사회에 끼친 충격도 컸다. 하지만 정작 이에 대한 기록은 서울시가 발간한 백서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사고 당시 수습과정을 촬영한 동영상 등 폐기된 자료도 많다. 서울시 관계자는 “20년 전만 해도 자료 보관이라는 측면을 별로 고려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삼풍백화점 참사부터 일주일 간의 과정을 그린 소설 ‘삼풍, 축제의 밤’의 작가 손영수 씨는 “공식 기록이 너무 적어 결국 당시 유가족과 당시 사고현장에 있었던 구조대원 등을 찾아다니며 구술기록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손씨의 소설은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다음 웹툰 ‘삼풍’으로 연재되기도 했다. 손씨는 “세월호 사건 전까지만 해도 내용이 칙칙하다며 ‘왜 이런 내용을 올리냐’고 항의하는 메일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참사 20주기였던 지난달 29일, 위령탑에서 만난 한 유가족은 사고에 대해 말하기를 극구 거부하다가 이렇게 한 마디 했다.

“기 자 양반. 이거 하나는 꼭 써주쇼. 세월호가 왜 벌어졌다고 생각하쇼? 반성? 개선? 삼풍백화점 때는 안 그랬는줄 알아? 지금 여길 보세요. 이게 뭡니까. 이 나라는… 대한민국은, 사고 당한 사람말고는 안 바뀌어요. 절대 안 바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