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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이란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도 중요하다. 학문의 형식은 곧 글쓰기 형식을 말한다. 근대 학문의 글쓰기는 비록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 사이에 분야별 특수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어떤 주제에 대한 논문 형식을 지향한다. 근대 이전의 학문에도 시대에 유행하는 학문 풍조에 따라 특정한 유형의 글쓰기가 있었다. 성리학이 지배적인 학문으로 전개되었던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인 유가 경전에 대하여 합리적인 주석으로 해설하는 주석학적 글쓰기가 있었고, 아울러 성리학의 특정한 개념이나 주제를 명징하게 도표로 해설하는 도설적 글쓰기가 있었다. 고려 말기 권근(權近)이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은 도설적 글쓰기의 대표작이라 할 텐데, 이 밖에도 천명, 인심도심, 사단칠정 등 다양한 개념에 대한 도설이 출현하였다. 이와 같은 도설적 글쓰기는 성리학의 시대가 지나가고 서양철학이 유입되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신학문을 하는 학문 형식으로 활용되었다. 아래에 소개할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자유도설」은 자유란 무엇인지 도설로 설명하는 독특한 작품인데, 전통적 학문 형식으로 새로운 학문 내용을 담은 이 글에서 과연 그가 자유에 관해 어떤 사색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자유도설(自由圖說)

  
   서양 사람은 “자유가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자유란 천하의 공공 의리이고 인생의 중요한 도구이다. 사람들마다 자유가 있으니 내가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남도 나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 인의와 도덕이 그 가운데에 행해질 것이다. 사민평등(四民平等)이란 평민이 귀족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다. 참정권이란 국민 전체가 정부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다. 속지자치(屬地自治)란 식민지가 모국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다. 종교신앙(宗敎信仰)이란 신도가 교회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다. 민족건국(民族建國)이란 본국인이 외국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다. 생계노동(生計勞動)이란 빈민이 부자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에는 참된 것[眞]과 꾸며낸 것[僞], 부분적인 것[偏]과 전체적인 것[全], 문명적인 것과 야만적인 것의 구별이 있다. 정신상의 자유는 참된 자유이고 형식상의 자유는 꾸며낸 자유이다. 사회의 자유[群體自由]는 전체적인 자유이고 개인의 자유는 부분적인 자유이다. 법에 복종하고 규약을 지키는 것은 문명적인 자유이고 공의를 해치고 사익을 꾀함은 야만적인 자유이다. 사랑과 이익과 쾌락의 주의에 관한 학설로 말한다면, 사회[群體]를 사랑하고 사회에 이익을 주고 사회에 쾌락을 주는 것은 참된 자유이고 전체적인 자유이고 문명적인 자유이다. 나 하나를 사랑하고 나 하나에 이익을 주고 나 하나에 쾌락을 주는 것은 꾸며낸 자유이고 부분적인 자유이고 야만적인 자유이다. 자유의 반대는 노예이다. 자유의 능력을 완전하게 보장받고 싶으면 반드시 먼저 노예의 습관을 고쳐야만 옳다.



  자유란 손을 놓고 다리를 풀고 길거리에서 팔을 흔드는 것, 구속 받지 않고 관리 받지 않고 하고 싶은 만큼 뜻대로 하는 것,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땅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이른다. 자유에 관한 학설은 프랑스에서 나왔다. 영문으로 프리덤(freedom)이라 하는데 곧 개방이란 뜻이다. 대개 프랑스는 당시에 압제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개방을 상위의 뜻으로 삼고 그 가운데 은연 중 법률에 복종한다는 뜻을 함축하였다. 일본에서 자유 두 글자로 번역하자 마침내 함부로 행동함을 무한의 자유로 삼게 되었다. 몽테스키외는 자유에 관해 말하기를 ‘칼을 찰 자유, 수염을 기를 자유, 폭군의 전제에 대항하고 민권의 공론을 열 자유, 혁명의 자유’ 등을 말했다. 자유의 앞에 칼을 찬다, 수염을 기른다 등의 글자를 사용했으니, 이는 유한의 자유이지 무한의 자유가 아니다. 곧 지금 각국 헌법에서 말하는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이사의 자유, 출판의 자유가 모두 한 가지 일의 자유를 말한 것이지 보편적인 자유가 아니다.


  비유컨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에게 조금 개방을 허락해 칼을 벗기고 사슬을 풀어 정원에서 거닐게 하고 간혹 여전히 발에 족쇄를 채우면서 손에 수갑을 풀어 음식을 얻게 하는 것이지, 감옥을 탈출해 어지럽게 달아나 함부로 미쳐 날뛰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 사람이 태어나서 손발을 놀리지 못하고 몸을 뒤집지 못하고 코와 입으로 숨쉬지 못하게 하면 갓난아기 때에 이미 죽어 버려 살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어린 아이들의 자유를 들어 주어 칼을 쥐고 불장난을 하게 놓아 둔다면 또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들의 자유를 들어줄 때도 있고 예법으로 구속할 때도 있으니 자유를 말하는 자는 불가불 깊이 이 뜻을 유념해야 한다.


  무릇 자유의 정의는 공자 문하에서 이미 맨 먼저 제창했다. 자공(子貢)은 ‘나는 남이 내게 가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나도 남에게 가하고 싶지 않다.’고 하였는데, ‘남이 내게 가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란 나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음이요, ‘나도 남에게 가하고 싶지 않다’란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음이다. 남과 나의 경계에서 각각 자기 분수를 완전히 한다는 말뜻이 완벽하고 지극하나 대동(大同)의 세상에 이르지 않으면 실행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공자는 ‘네가 미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산만하고 기율이 없어서 정히 법률의 복종에 전력해야 마땅한데 만약 자유로써 구원하기를 원한다면 이는 소갈병을 앓는데 독주를 마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죽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 이상룡(李相龍), 〈자유에 관한 도설[自由圖說]〉,《석주유고(石洲遺稿)》

▶ 자유도설(自由圖說)의 도표부분 : 자유를 크게 진자유(眞自由), 전자유(全自由), 문명자유(文明自由)의 3대 항목으로 나누고 그 밑에 세부항목을 두어 서술하고 있다.
 
 
 
 
   
 [해설]
 
  
 
   
   자유라는 말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말뜻은 쉽지만 말의 풍경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를 겪어 왔다. 인천 자유공원에서 자유의 풍경, 정비석의 자유부인에서 자유의 풍경, 이해조의 자유종에서 자유의 풍경은 서로 다르다. 오늘날 자유는 특정한 개념을 내포하는 명사이지만 이 말은 본래 명사가 아닌 동사였다. 동사로 쓰일 때 이 말은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었다. 위복자유(威福自由 : 위복을 마음대로 한다), 백사자유(百事自由 : 온갖 일을 마음대로 한다) 등 여러 가지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오늘날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대 한국어에서는 이음절의 한자어가 명사로 쓰이지만 동일한 한자어가 전통 한국어에서는 동사로 쓰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자유 역시 이러한 상황에 있었던 이음절 한자어의 하나였다.

  자유라는 말이 오늘날과 같은 개념을 내포하는 명사로 확정된 것은 일본의 사상가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영국의 철학자 밀의 『자유론(on liberty)』을 1872년 『자유지리(自由之理)』로 번역한 것이 주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자유는 영어 단어 liberty의 번역어로 정착되면서 비로소 오늘날의 말뜻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자유 이외에도 liberty에 대응하는 번역어로는 자주(自主), 자재(自在), 임의(任意) 등 여러 가지 단어가 경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유력했던 단어는 자주였지만 자주는 영어 단어 independence의 번역어로도 쓰이고 있었다. 예컨대 중국에서 서양 선교사가 발행한 월간지 『만국공보(萬國公報)』는 우리나라 독립협회의 활동을 전하면서 독립협회를 자주회(自主會)라고 표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유가 liberty의 번역어로 정착함에 따라 자유라는 말뜻은 liberty에 구속 받았지만 자유라는 말의 풍경과 liberty라는 말의 풍경 사이에는 역사적 환경의 이질감이 남아 있었다. 밀의 『자유론』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견과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여 창조적인 성취를 기한다는 것으로 19세기 중엽 영국의 자유주의 조류 속에 있었다. 자유주의는 내부적으로 다양한 계열이 있었지만 구체제의 전제 왕권의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정치의식을 기반으로 여기에 더하여 경제적 특권, 신분적 차별, 문화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을 추구한다는 지향성이 담겨져 있었다.

  반면, 20세기 초 한국 사회가 당면하였던 자유는 이와 같은 자유주의의 자장 속에 완전히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청말 양계초(梁啓超)의 저작물에서 자유는 서양 근대 문명의 역사적 진보 과정의 척도로 설명되었으며, 동시에 서양과 경쟁할 수 있는 근대 국민국가의 주체를 만들기 위해 중국인 하나하나에게 요구되는 내면적인 자기 혁신으로 설명되었다. 자유의 설득력은 자유의 본질적 가치로서 제시된다기보다 서양의 역사적 경험으로서 먼저 정당화되었다. 또한, 국가를 떠난 개인, 국민에 앞선 개인은 자유의 주체로 상정되기 어려웠다.

  양계초의 자유론은 한국 사회에 많이 읽혔지만 그것을 도설로 나타낸 사람은 이상룡이었다. 이 점에서 이상룡의 이 글 「자유도설」은 한국 근대 양계초 사상의 수용 과정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 양계초 사상을 이론적인 차원보다는 실천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던 한국 근대 사상계의 분위기를 반영한 듯 이 글 역시 양계초의 자유론을 충실히 재현하였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이 글의 도(圖) 전체와 설(說)의 전반부는 전적으로 양계초의 자유론을 옮겨 온 것이다.

  하지만, 이상룡의 독특한 관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도(圖)에 있는 진자유(眞自由)의 네 가지 항목이 양계초가 제시한 본래 항목의 역순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설(說)의 후반부에서 강하게 피력한 바 전면적인 자유의 유보 내지 제한에 관한 주장은 양계초의 전체 자유론에서 중심적인 주장은 아니었다. 그는 양계초가 제시하는 자유론의 이론적 구조에 대해서는 공감했지만, 김흥락(金興洛)을 통해 정통 퇴계학맥에 입지해 있었던 안동 출신 유학자답게 자유와 질서의 관계에 대해 무관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이 글에서 언급한 질서는 예와 법이지만 전통 유학에서 질서의 근원으로 중시된 것은 인륜이었다. 사실 보수 유림에서 양계초를 비판했던 최대의 논점이 양계초의 사상이 인륜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상룡은 과연 자유와 인륜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