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보 백보를 파하라 - KBS 백선엽 다큐를 보고
맹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그 왕이 맹자에게 묻는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하는데 왜 우리 나라 인구가 다른 나라보다 많아지지 않는 거요?” 이에 대해 맹자는 당신이나 이웃나라 왕이나 백성을 위한 진심에서보다는 부국강병에 속셈을 두고 있을 뿐이라며 저 유명한 ‘오십보 백보’의 이야기를 꺼낸다. 오십 보 도망가던 병사가 자신의 50보 앞에 먼저 도망가던 병사를 발견하고 “이 비겁한 놈아.” 욕설을 퍼붓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었다.
심각한 자아도취에 빠져 있던 위나라 양혜왕에게는 이 말이 죽비와 같이 딱 소리를 내며 어깨에 내려앉았을 것이다. 나 또한 맹자의 비유의 탁월함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하지만 이 오십보 백보의 고사가 자아성찰을 통한 본질적 변화를 촉구하는 본령을 벗어나서 100보 도망간 병사의 물귀신 작전의 논거로 종종 쓰이는 사실에는 극도로 약이 오른다.
즉 고사에서처럼 50보 도망간 자가 100보 도망간 자에게 비겁하다고 호통을 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100보를 튄 이가 50보 내달린 이에게 “뭐 너랑 나랑 똑같네.”라고 눙치는 것은 수용 불가의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역발상으로 보면, 50보 도망간 이는 그 시간만큼 적과 더 싸운 것이며, 100보 도망간 이의 퇴로를 지켜 준 것이 아닌가.
거기에 100보를 도망간 이가 같은 졸병이 아니라고 가정해 보자. 내 뒤를 따르라 물러서는 자는 목을 치겠다 호언하던 장수가 저만치 앞에서 허겁지겁 꽁무니를 드러내고 있다고 치자. 이때 “장군님 어찌 이러실 수 있사옵니까?”라고 물을 때 장군이 “뭐 피차 오십보 백보 아니냐?”라고 대답한다면 지하의 맹자가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켜 일갈할 것이다. “이런 왕빠딴”
며칠 전 KBS의 중계팀장인가 뭔가 하는 이가 “안중근 등 몇 몇 외에는 다 친일파 아니었냐? 고리타분하게 친일파 얘기하지 말자.” 는 글을 사내 게시판에 올렸다고 해서 매우 배불리 욕설을 얻어드신 바 있다. 어느 트위터러가 표현해 주셨듯, “요즘같은 장마철에 광화문 앞에서 먼지 나게 맞아야 정신 차릴” 말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에게는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기실 그 논리는 그만의 것이 아니라 해방 이래 친일파들이 그들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가동해 온 변형된 ‘오십보 백보’ 논리이기 때문이다.
독립군 때려잡았던 일본군 출신이 그야말로 먹고 살기 위해 일본군 군속으로 일했던 이에게 “너는 독립군 위해 일했냐? 오십보 백보지.”라고 윽박질렀고, 앞장서서 창씨개명하고 내선일체를 부르짖었던 이들이 배급 끊길까 두려워 ‘가네모토’가 된 김서방에게 “너는 창씨개명 안했냐? 오십보 백보지.”라고 기를 죽이는 수법은 1945년 을유년 이래 을씨년스럽게 유구하다. 백보는 고사하고 천 발짝 도망쳤던 이들이 오십보는 커녕 다섯 발짝 마지못해 물러섰던 이들과 똑같다고 우겼고 자신들을 향한 창끝의 방패로 삼았던 것이다. “안중근하고 몇 명 말고는 다 친일파 아니었냐?”
물론 해방된지 65년을 헤아리는 마당에 ‘친일’의 프레임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음도 사실이다. 나 자신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는 외침을 들으면 동조의 박수보다는 안스런 눈길이 앞선다. 원조 친일파들이 대부분 백골이 진토된 마당에 그들의 손자들을 청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완용의 조카가 무슨 박물관장을 하고 있으니 어찌 하자는 전혀 사실도 아닌 연좌제식 비분강개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물리적이고 실질적인 ‘친일청산’의 가능성은 세월의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는 뜻이다. 65년 전에 못한 일이 어찌 오늘날에 가능하랴.
그러나 나는 맹자도 울고 갈 ‘오십보 백보론’의 한계만큼은 깨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서 가문의 명예와 정치적 목적과 개인의 호오를 벗어난 진실이 추구되어야 하며, 그 노력을 통해 친일행위자들의 객관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친일 청산’의 실체라고 믿는다. 이런 견지에서 KBS가 야심차게 백선엽 장군을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은 철저하게 실패한 작품일 수 밖에 없다.
그가 복무한 간도 특설대라면 간도에서 반일 항쟁을 벌이고 있는 무장 집단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던 부대였다. 즉 백선엽은 일본과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치안과 이익을 위해 전투를 치른 이이며, 친일파의 혐의를 벗기 어려운 인물이다. 백선엽 자신도 그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들이 추적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섞여 있었다.......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들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오십보 백보론을 발견한다. 게릴라들이 투쟁해서 독립이 되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한 행동이 독립을 늦춘 것도 아니며, 일제 시대라는 특성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라는 대단히 망연한 “우리 모두 피해자론” 말이다. KBS는 이 지점을 짚어야 했다. 파헤쳐야 했다. 더더구나 국민으로부터 시청료를 강제징수하고 있는 방송이라면 건조하고 밀도 있게 노장의 과거를 건드리고 그의 속내를 들어야 했다.
6.25 전쟁 때 대한민국이 살아남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전쟁 초기 심각한 병력의 열세 속에서도 사단 병력을 온존하며 후퇴했던 백선엽의 역량과 다부동 전투에서 보여 준 ‘사단장 돌격’의 기개에 경의를 표할 수 있다. 지금도 미군 사단장이 초동 부임할 경우 인사를 드리러 간다는 ‘제너럴 백’을 전쟁 영웅으로 대접할 마음도 있다. 아니할말로 드레스덴 대공습으로 일거에 민간인 수십만을 죽여 버린 2차대전 당시 영국 공군 장관 아더 해리스의 동상도 버젓한 판에 6.25를 치른 나라에서 전쟁 영웅 하나쯤 살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제대로 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라도 KBS는 그의 과거를 명확하게 조명했어야 하고 백선엽 장군은 압제의 손발이 되어 동족을 토벌했던 과거에 대해 진솔한 사과를 했어야 했다. 용기는 ‘사단장 돌격’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한 영원한 1사단장 백선엽의 깃발은 누더기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65년 전 우리는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와중에 자신의 부귀영달을 위해, 또는 완전히 넋이 나가버려서 제 민족을 배반하고 그 등짝을 후려치며 한 세상 보낸 이들을 처벌하거나 반성을 요구할 기회를 놓쳤다. 그들의 대부분이 지상에서 사라진 지금, 이미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들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긍정성과 부정성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오십 보 백 보 아니겠어?” 하면서 언뜻 은근슬쩍 같기도 하지만 롯데 이대호 홈스틸같이 눈에 대문짝만하게 들어오는 사기 행각은 제발덕분 종식되어야 한다. <전쟁과 군인>은 그 홈스틸을 쿵쾅거리면서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조직의 간부라는 이는 “안중근 외에는 다 친일파였잖아?”라며 배를 내밀었다. KBS가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다. 결국 오히려 KBS는 백선엽 장군을 모욕했다.
심각한 자아도취에 빠져 있던 위나라 양혜왕에게는 이 말이 죽비와 같이 딱 소리를 내며 어깨에 내려앉았을 것이다. 나 또한 맹자의 비유의 탁월함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하지만 이 오십보 백보의 고사가 자아성찰을 통한 본질적 변화를 촉구하는 본령을 벗어나서 100보 도망간 병사의 물귀신 작전의 논거로 종종 쓰이는 사실에는 극도로 약이 오른다.
즉 고사에서처럼 50보 도망간 자가 100보 도망간 자에게 비겁하다고 호통을 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100보를 튄 이가 50보 내달린 이에게 “뭐 너랑 나랑 똑같네.”라고 눙치는 것은 수용 불가의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역발상으로 보면, 50보 도망간 이는 그 시간만큼 적과 더 싸운 것이며, 100보 도망간 이의 퇴로를 지켜 준 것이 아닌가.
거기에 100보를 도망간 이가 같은 졸병이 아니라고 가정해 보자. 내 뒤를 따르라 물러서는 자는 목을 치겠다 호언하던 장수가 저만치 앞에서 허겁지겁 꽁무니를 드러내고 있다고 치자. 이때 “장군님 어찌 이러실 수 있사옵니까?”라고 물을 때 장군이 “뭐 피차 오십보 백보 아니냐?”라고 대답한다면 지하의 맹자가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켜 일갈할 것이다. “이런 왕빠딴”
며칠 전 KBS의 중계팀장인가 뭔가 하는 이가 “안중근 등 몇 몇 외에는 다 친일파 아니었냐? 고리타분하게 친일파 얘기하지 말자.” 는 글을 사내 게시판에 올렸다고 해서 매우 배불리 욕설을 얻어드신 바 있다. 어느 트위터러가 표현해 주셨듯, “요즘같은 장마철에 광화문 앞에서 먼지 나게 맞아야 정신 차릴” 말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에게는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기실 그 논리는 그만의 것이 아니라 해방 이래 친일파들이 그들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가동해 온 변형된 ‘오십보 백보’ 논리이기 때문이다.
독립군 때려잡았던 일본군 출신이 그야말로 먹고 살기 위해 일본군 군속으로 일했던 이에게 “너는 독립군 위해 일했냐? 오십보 백보지.”라고 윽박질렀고, 앞장서서 창씨개명하고 내선일체를 부르짖었던 이들이 배급 끊길까 두려워 ‘가네모토’가 된 김서방에게 “너는 창씨개명 안했냐? 오십보 백보지.”라고 기를 죽이는 수법은 1945년 을유년 이래 을씨년스럽게 유구하다. 백보는 고사하고 천 발짝 도망쳤던 이들이 오십보는 커녕 다섯 발짝 마지못해 물러섰던 이들과 똑같다고 우겼고 자신들을 향한 창끝의 방패로 삼았던 것이다. “안중근하고 몇 명 말고는 다 친일파 아니었냐?”
물론 해방된지 65년을 헤아리는 마당에 ‘친일’의 프레임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음도 사실이다. 나 자신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는 외침을 들으면 동조의 박수보다는 안스런 눈길이 앞선다. 원조 친일파들이 대부분 백골이 진토된 마당에 그들의 손자들을 청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완용의 조카가 무슨 박물관장을 하고 있으니 어찌 하자는 전혀 사실도 아닌 연좌제식 비분강개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물리적이고 실질적인 ‘친일청산’의 가능성은 세월의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는 뜻이다. 65년 전에 못한 일이 어찌 오늘날에 가능하랴.
그러나 나는 맹자도 울고 갈 ‘오십보 백보론’의 한계만큼은 깨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서 가문의 명예와 정치적 목적과 개인의 호오를 벗어난 진실이 추구되어야 하며, 그 노력을 통해 친일행위자들의 객관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친일 청산’의 실체라고 믿는다. 이런 견지에서 KBS가 야심차게 백선엽 장군을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은 철저하게 실패한 작품일 수 밖에 없다.
그가 복무한 간도 특설대라면 간도에서 반일 항쟁을 벌이고 있는 무장 집단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던 부대였다. 즉 백선엽은 일본과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치안과 이익을 위해 전투를 치른 이이며, 친일파의 혐의를 벗기 어려운 인물이다. 백선엽 자신도 그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들이 추적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섞여 있었다.......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들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오십보 백보론을 발견한다. 게릴라들이 투쟁해서 독립이 되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한 행동이 독립을 늦춘 것도 아니며, 일제 시대라는 특성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라는 대단히 망연한 “우리 모두 피해자론” 말이다. KBS는 이 지점을 짚어야 했다. 파헤쳐야 했다. 더더구나 국민으로부터 시청료를 강제징수하고 있는 방송이라면 건조하고 밀도 있게 노장의 과거를 건드리고 그의 속내를 들어야 했다.
6.25 전쟁 때 대한민국이 살아남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전쟁 초기 심각한 병력의 열세 속에서도 사단 병력을 온존하며 후퇴했던 백선엽의 역량과 다부동 전투에서 보여 준 ‘사단장 돌격’의 기개에 경의를 표할 수 있다. 지금도 미군 사단장이 초동 부임할 경우 인사를 드리러 간다는 ‘제너럴 백’을 전쟁 영웅으로 대접할 마음도 있다. 아니할말로 드레스덴 대공습으로 일거에 민간인 수십만을 죽여 버린 2차대전 당시 영국 공군 장관 아더 해리스의 동상도 버젓한 판에 6.25를 치른 나라에서 전쟁 영웅 하나쯤 살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제대로 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라도 KBS는 그의 과거를 명확하게 조명했어야 하고 백선엽 장군은 압제의 손발이 되어 동족을 토벌했던 과거에 대해 진솔한 사과를 했어야 했다. 용기는 ‘사단장 돌격’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한 영원한 1사단장 백선엽의 깃발은 누더기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65년 전 우리는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와중에 자신의 부귀영달을 위해, 또는 완전히 넋이 나가버려서 제 민족을 배반하고 그 등짝을 후려치며 한 세상 보낸 이들을 처벌하거나 반성을 요구할 기회를 놓쳤다. 그들의 대부분이 지상에서 사라진 지금, 이미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들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긍정성과 부정성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오십 보 백 보 아니겠어?” 하면서 언뜻 은근슬쩍 같기도 하지만 롯데 이대호 홈스틸같이 눈에 대문짝만하게 들어오는 사기 행각은 제발덕분 종식되어야 한다. <전쟁과 군인>은 그 홈스틸을 쿵쾅거리면서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조직의 간부라는 이는 “안중근 외에는 다 친일파였잖아?”라며 배를 내밀었다. KBS가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다. 결국 오히려 KBS는 백선엽 장군을 모욕했다.
